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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깡 시골 한복판에 왜 일본 정원이 있을까 — 코우라에서 마주친 이상한 풍경, 그리고 그곳에 있었던 조선인


공원 입구


캔버라에서 차로 두 시간 넘짓, NSW 중서부의 코우라(Cowra)라는 작은 마을에 다녀왔습니다. 출장겸, 여행겸, 와이프와 함께요! 여긴 인구 만 명도 안 되는, 그냥 지나치기 딱 좋은 조용하고 아름다운 호주 시골이에요.

그런데 거기서 신기하게도 일본 정원을 보았습니다. 정식 명칭은 Cowra Japanese Garden & Cultural Centre 입니다.


호주 시골 한복판에, 그것도 남반구에서 가장 큰 일본 정원이래요. 돌 배치며 분위기며 연못이며 단풍나무며, 누가 봐도 각잡고 만든 진짜배기 였습니다. 저희 부부는 구경하면서 이런 대화를 했어요.


"아니 왜 여기 호주에 일본 정원이 있지? 신기하다 진짜. 두 나라가 그렇게 친한가. 역사적으로 기념이 있는 곳인가?"라고요. 물론 시드니면 이해가 갑니다. 일본인이 은근 많고 매우 크고 유명한 관광 도시니 수요가 그래도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코우라는 밀밭이랑 양떼 밖에 없는 동네예요. 그거도 시드니에서 엄청 먼 깡시골이고요. 관광객 유치용으로 만들기엔 규모가 너무 크고 관리도 잘 되어있고 너무 진지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찾아봤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고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이 글은 그 이유 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저는 이런 이야기가 있을거라고는 절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같이 보실까요! 



코우라 도시 약도




1. 1944년, 이 마을에는 4,000명의 포로가 있었다


코우라는 시드니에서 서쪽으로 314km 떨어진 농촌 지역이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제12 포로수용소(No. 12 Prisoner of War Compound)* 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었다. 이곳에는 4,000명의 추축국 군인과 민간인이 수용돼 있었다.


수용소는 1941년에 문을 열었고, A·B·C·D 네 개 구역으로 나뉜 원형 구조였습니다. 원을 사등분한 모양이었고, 남북으로 난 'Broadway'와 동서로 난 'No Man's Land'라는 두 개의 길이 구역을 갈랐다.


영국이 건설 비용을 댔다고 한다. 연합군이 해외에서 잡은 추축국 포로를 호주가 대신 수용해주는 협정의 일부였다. 1941년 10월에 이탈리아인들이 먼저 도착해서, 텐트에서 지내며 지역 인부들과 함께 수용소를 직접 지었다. 일본인 포로와 억류자들은 1943년 1월부터 들어오기 시작했고요.


구역 배치는 아래와 같았다고 합니다.

구역

포로로 수용된 사람들

A · C

북아프리카에서 잡힌 이탈리아 병사들

B

일본군 사병·부사관 (1,104)

D

일본군 장교, 그리고 조선인 대만인


A와 C 구역에는 이탈리아 사병과 부사관이, B 구역에는 일본군 사병과 부사관이, 그리고 D 구역에는 일본군 장교와 함께 조선인과 대만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네. D 구역이요. 갑자기 포로에 조선인이 나오다니!





2. D 구역에 있었던 사람들


코우라의 포로 중에는 2,000명의 이탈리아인, 일본군에서 복무 했던 조선인과 대만인, 그리고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의 요청으로 억류된 인도네시아 민간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브리태니커(브리태니커 백과사전, Encyclopedia Britannica)는 D 구역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 일본군 장교들과 함께, 일본에 의해 강제 징집된 조선인과 중국인 노무자들이 수용돼 있었다고요.


이 문장을 읽고 많이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슬프기도 했고요.

생각해보세요. 1944년입니다.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고, 수 많은 조선  사람들이 일본군에 끌려갔습니다. 남태평양 어딘가에서 싸우다 연합군에 잡혔고, 배에 실려 지구 반대편 호주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여기, 호주 밀밭 한복판의 철조망 안에서 — 자기를 끌고 온 일본군 장교들과 같은 구역에 갇혀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님들에겐 이 전쟁은 뭐였을까요. 일본이 이겨도 조국은 식민지고, 일본이 져도 자기는 '일본군 포로'입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끌려와서, 질 수밖에 없는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겁니다.


호주 사람들 눈에 그들은 그냥 '적군'이었어요. 일본군 군복을 입고 잡혔으니까요. 원래는 이 전쟁과는 전혀 상관 없는 조선 사람인데.





3. 1944년 8월 5일, 새벽 2시


1944년 8월 4일, 수용소 측은 B 구역 수감자들에게 상당수가 400km 서쪽의 헤이(Hay) 수용소로 이송될 거라고 통보했다. 호주군은 포로 이송 시 사전 통지를 의무화한 1929년 제네바 협약 26조를 지킨 것이었어요. 그런데 이 통보가 오히려 탈주의 도화선이 되었다.


일본군에게 포로가 된다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많은 이들에게 이 탈주는 애초에 자살에 가까운 것이었고,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을 마지막 기회였다.


8월 5일 새벽 2시경, 일본군 나팔 소리가 신호가 됐다. B 구역의 막사 대부분에 불이 붙었고, 최소 900명의 일본인 포로가 야구 방망이와 칼, 급조한 무기를 들고 철조망으로 돌진했다.


개조한 식당용 칼과 야구 방망이를 든 그들은 외곽 철조망을 덮치고 기관총 진지를 제압했다.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시도였고, 231명의 일본인 포로가 죽고 108명이 다쳤다고 한다. 생존자는 며칠에 걸쳐 인근 들판에서 모두 다시 붙잡혔다. 


호주군에서는 벤저민 하디, 랠프 존스, 찰스 셰퍼드 이등병이 목숨을 잃었고, 해리 돈캐스터 중위는 포로 추적 중 매복에 걸려 사망했다. 전쟁 중 최대 규모의 포로 탈주였고, 동시에 가장 참혹한 사건 중 하나였다.


호주 정부는 연합군 포로에 대한 보복을 우려해 사건을 덮으려 했지만, 1944년 9월 존 커틴 총리가 결국 기본 사실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일본 정부의 반응이었다. 그냥 무시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인정하는 건 곧 '일본군 포로가 존재한다'는 걸 시인하는 것이었고,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때 당시엔 죽은 뒤에도 없는 사람 취급을 받은것. 참 같은 나라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4. 그런데 — 두 달 전, 한 조선인이 있었습니다


이 탈주는 기습이 아니었다. 호주군은 미리 탈주가 날거라는걸 알고 있었다고 한다. 과연 어떻게 알았을까?


1944년 6월, 한 조선인 포로가 대규모 탈주 계획을 경비대에 알렸다고 한다. 이에 호주 주둔군은 B 구역 바깥에 비커스 기관총 두 정을 배치했습니다.


호주 경비병들은 B 구역 일본인들의 뿌리 깊은 불만을 알고는 있었지만 탈주를 걱정하진 않았다. 수용소는 제네바 협약을 매우 충실히 지켰고 경비병들은 포로를 잘 대우했다. 무엇보다, 탈주 시도가 자살행위라는 걸 수감자들 스스로도 알 거라고 믿었다. 이 안일함이 바뀐 게 1944년 6월, 한 조선인 포로가 대규모 탈주 정보를 흘리면서 였다.

두 달 뒤 새벽 2시, 그 기관총이 불을 뿜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많은 생각이 들게 되었어요. 이 조상님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밀고자였을까요? 아니면 수백 명이 죽는 걸 막고 싶었던 걸까요? 아니면 일본군에 대한 원한이었을까요, 또 아니면 그냥 살고 싶었던 걸까요?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걸까요?


우리는 여기서 그의 이름조차 모릅니다. 기록에는 '한 조선인 포로'라고만 남아 있어요. 이름도 모르는. 참 슬프죠. (자료에 따라 국적을 밝히지 않고 그냥 '제보자'라고만 적은 것도 있다고 합니다.)

분명한 건 이겁니다. 세계대전 최대의 포로 탈주 사건, 그 한복판에 이름 없는 조선인 한 명이 서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가 한 선택이 그날 새벽의 결과를 바꿔놓았다는 것.

한국 역사책에도, 일본 역사책에도, 호주 역사책에도 그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가 없었다면 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을수도 있는 겁니다. 역사가 바뀌었을 수도 있지요.






5. 전쟁이 끝나고, 마을 사람들이 한 일


코우라 수용소는 1947년까지 운영되다가 마지막 포로와 억류자들이 본국으로 송환 되면서 문을 닫았습니다. 이후 수용소는 해체됐고, 건물 상당수는 다른 정부 시설로 옮겨졌으며, 철조망과 울타리는 지역 농부들에게 팔렸다.


그리고 죽은 일본인들의 무덤이 남았다.

적군의 무덤. 얼마 전까지 이 마을 아들들을 죽이던 나라의 군인들. 심지어 이 사건에서 호주 경비병 네 명이 죽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뒤, 지역 RSL(재향군인회) 회원들이 일본인 무덤을 돌봤습니다. 연합군 무덤과 함께요. 그냥 방치하지 않은 게 아니라, 직접 손으로 돌봤습니다. 참전용사들이요. 자기가 싸웠던 적의 무덤을.


일본 대사관은 1955년 일본인 묘지 실태 조사를 시작하면서 유해 송환을 검토했다. 그런데 1959년, 호주에 전쟁묘지를 세우는 쪽으로 결론이 났고, 1962년 9월 그 장소로 코우라가 선정됐다.


일본 측은 유해를 본국으로 가져가려 했지만, 코우라 RSL이 무덤을 돌봐온 정성에 너무나 감명받은 나머지 대신 호주 정부에 코우라에 공식 일본 전쟁묘지를 세우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승인이 났고, 1964년 8월 4일에 공식 개장했다.


1963년 그 땅은 일본에 양도됐다. 코우라 일본인 전쟁묘지는 호주에서 유일한 일본인 전쟁묘지이고, 2차대전 중 호주에서 사망한 모든 일본인 포로의 유해가 이곳에 있다. 그저 탈주 사건 희생자일뿐 아니라 다른 억류자들, 그리고 다윈 공습 때 격추된 일본 비행사들까지 전부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싸운 사람들이, 싸웠던 사람들을 묻어준 것. 



공원 약도





6. 그래서 정원이 생겼다


이제 제 궁금함의 답입니다.

1971년, 코우라 관광개발위원회가 일본과의 이 인연을 기념하기로 하고 마을에 일본 정원을 제안합니다. 일본 정부는 자국 전사자를 존중해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 사업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호주 정부와 민간에서도 자금이 들어왔다고 하고요.


정원은 1977년에 설계되어 1979년에 문을 열었습니다. 설계자는 세계적인 일본 정원 설계가 나카지마 켄(1914-2000)이었어요. 그는 몬트리올 식물원(1988), 모스크바 식물원(1983-87), 휴스턴 허먼파크 일본정원(1992), 샌디에이고 우호정원(1985)도 설계했는데, 코우라가 그중 가장 이른 작품입니다. 5헥타르(12에이커) 규모로 남반구 최대의 일본 정원이에요. 1단계가 1979년, 2단계가 1986년에 완성됐습니다.


시드니에 살던 한 일본인 타쿠라 켄이 벚나무 가로수길을 제안했습니다. 묘지에서 정원까지 이어지는 길로요. 설계자 나카지마 켄은 이 벚꽃길을 상징적인 길로 봤다고 합니다. 죽은 일본인들의 영혼이 묘지에서 나와 정원에서 평화롭게 지내도록 길을 밝혀주는 길.


나카지마는 이 정원을 자신이 만든 최고의 작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유해는 자신의 걸작이 내려다보이는 정원 꼭대기에 안치됐다고 합니다.


처음엔 그저 관광지로 여겨졌던 이 정원은, 이제 일본과 호주 사이 화해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호주가 유엔의 '세계 평화의 종' 사업에 참여할 때, 호주의 평화의 종은 수도가 아니라 코우라에 설치됐습니다. 이 작은 마을이 오랫동안 세계 평화와 국제적 이해에 기여해온 것을 인정해서요.

수도 캔버라 혹은 시드니를 제치고 시골 마을 코우라가요. 참신기하죠.



공원 가장 안쪽에서 바라본 모습






마무리: 저는 아직 정리가 안 됐습니다


솔직히 이 글,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카우라 이야기는 아름답습니다. 적을 묻어준 사람들, 그 정성에 감동해 세워진 정원, 영혼을 인도하는 벚꽃길. 전쟁 화해의 서사로 완벽해요.


그런데 저는 한 조선인이 계속 걸립니다.

일본은 자국 전사자를 위해 정원을 지었습니다. 호주는 자국 군인을 기립니다. 그럼 그 D 구역에 있던 조선인들은요? 아무것도 모르는 나라를 지배 하고 있는 군대에 끌려 와서 싸웠고, 포로가 됐고, 지구 반대편에 갇혔고, 자기를 끌고 온 사람들과 같은 구역에서 지냈던 그 사람들이요.


정원에도, 묘지에도, 그 조선인의 자리는 없습니다. 애초에 그들은 '일본군'으로 분류됐으니까요.

그 이름 모를 그 조선인 제보자. 그 분은 그 뒤로 집으로 돌아가셨을까요 아니면 일본으로 가셨을까요 어떻게 되였을까요. 그리고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우리는 영영 모를 겁니다. 그의 선택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고요.


화해의 정원은 두 나라 사이에 세워졌고, 그 사이에 끼어 있던 사람들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인도 포함해서 말이죠.


코우라에 가시게 되면, 정원 예쁘게 보고 오세요. 이 이야기도 기억 하시면서요! 공원 진짜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수용소 터에 서서 D 구역이 어디였는지 한 번만 찾아봐 주세요. 표지판에 조선인 이야기는 없을 겁니다. 그래도 거기 있었습니다. 우리 증조할아버지 내지는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이요.


호주 시골 밀밭 한복판에, 우리 역사의 조각이 하나 묻혀 있었습니다. 저는 그걸 모르고 호주에서 살다가, 출장 때문에 가게된 시골에서, 우연히 가보게 되었던 일본 정원이 신기해서, 처음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가, 호주 사진 정리하다가 옛기억이 나게 되었고, 그때 그 공원을 검색까지 해보다가 결국 알게 되었습니다.




공원 중간에서 바라본 모습




📍카우라 방문 정보


가는 법

  • 캔버라에서 약 2시간 (차)
  • 시드니에서 약 3시간 30분 / 서쪽으로 314km
  • 대중교통은 사실상 불가. 렌터카 필수입니다

볼 곳 (다 붙어 있어요, 반나절이면 충분)

  • 코우라 일본 정원 & 문화센터 (Binni Creek Road) — 남반구 최대 일본 정원
  • 일본인 전쟁묘지 / 호주군 묘지 — 호주 유일의 일본인 전쟁묘지. 무료
  • 포로수용소 터 — 건물은 없고 터와 안내판만 남아 있습니다. 오히려 그래서 더 먹먹해요. 우리 조선인 분은 결국 어떻게 되셨을까. 고국으로 집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셨을지 일본으로 가셨을지 아직 여기 계실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 코우라 방문자센터 — 탈주 사건 자료가 여기 제일 잘 되어 있습니다.
  • 벚꽃 가로수길 — 묘지에서 정원으로 이어지는 그 길.

언제 가면 좋나

  • 9월 — 사쿠라 마츠리(벚꽃 축제). 코우라 관광의 가장 큰 행사입니다. 벚꽃길이 만개할 때예요.
  • 8월 5일 — 탈주 사건 기념일. 매년 추모 행사가 열립니다
  • 가을(4~5월)도 좋습니다. 단풍나무가 정원에 많아요

참고

  • 코우라는 와인 산지이기도 합니다. 정원 보고 와이너리 들르는 코스로 많이들 짭니다
  • 근처 오렌지(Orange)라는 도시도 차로 한 시간 거리입니다. 여기도 와인이 유명하고 가을 단풍이 예쁘다고 해요.


호주 전쟁기념관





※ 이 글은 호주 재향군인부(Anzac Portal), 호주 전쟁기념관(AWM), 호주 국립기록보관소(NAA), 브리태니커, NSW 전쟁기념물 등록부, 내셔널트러스트 기록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사망자 수는 자료마다 231명·234명 등으로 조금씩 다르게 기록돼 있어, 호주 국립기록보관소 기준(일본인 231명, 호주군 4명)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또한 자료에 따라 조선인 포로로 기록 되어 있는곳도 있으나, 국적을 밝히지 않은 자료도 있다라고 기록이 남아 있는곳도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정확히는 조선인이 아닐 수도 있지만 맞을 수도 있는 가능성이 큰것도 사실입니다. 이 부분이 한국인으로써 흥미롭게 다가와서 해당 글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더 알아보려면




다음에도 평범한 호주 생활 중에 또 신기하고 재미있고 흥미로운 점을 발견 하게 된다면 찾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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